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처드 3세 (문단 편집) === [[외아들]]의 죽음 === 그런데 리처드에게 큰 타격을 준 사건은, [[1484년]] 후계자인 외아들의 죽음이었다. 리처드는 두 조카를 죽이고 나서도 뻔뻔했다. 리처드 3세의 유일한 적자 에드워드가 죽고나자 [[후계자]]가 없었고 일단 자신의 누이의 아들인 외조카 존 드 라 폴을 추정상속자로 지명했다. 그러나 왕비 [[앤 네빌]]이 아이를 못 낳자 '왕비가 [[2월]]까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(?)'며 소원을 빌고 다녔는데 왕비는 [[4월]]에 기적적(?)으로 사망했다. 에드워드 5세를 폐위할 때까진 그나마 괜찮았지만, 유일한 적자가 죽은 데다가 두 조카를 죽인 뒤에는 이야기가 달라졌다. 리처드는 30살 넘고 후계자도 없는 데다가 [[장애인]]이었고, 조카들까지 살해했기 때문에 후계자도 없어졌으므로 [[왕권]]의 지지기반이 흔들렸다. 요크 가문 지지자들은 두 조카를 죽인 것에 반발했고, 리처드도 민심을 수습하고자 자신이 '''사생아라고 격하시킨'''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장녀 [[요크의 엘리자베스]]에게 청혼했다는 설이 나돌기도 했다. '''문제는 리처드와 에드워드 4세는 이복형제도 아닌 친형제고 [[요크의 엘리자베스|엘리자베스]]는 친조카라는 점이다.''' 당연히 신하들과 성직자들은 '사촌이면 몰라도 친삼촌-조카는 개족보'라며 극렬반대했다. 리처드는 치욕스럽게도 스스로 이런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며 공개 해명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. 이 당시 엘리자베스는 --살아남기 위해-- 자신의 두 동생을 죽인 익명(?)의 범인은 극렬 저주하면서, 리처드를 열렬히 사랑한다고 공개 응수했다. 두 사람이 결혼설이 퍼지자 비밀리에 우드빌 왕비와 동맹을 맺었던 [[헨리 튜더]]가 급히 프랑스의 지원과 랭커스터 지지자와 요크 지지자들 중 리처드에 등돌린 세력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반란군이 상륙하자 놀란 리처드는 전투에 나섰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